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문단 편집) === 트로이나 전투 === 시칠리아 전역에서 가장 처절하면서도 가장 규모가 큰 트로이나 전투가 1사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트로이나는 추축군이 설정한 방어선의 주요 거점이었으므로 독일군 제15장갑척탄병사단과 이탈리아군 아오스타 사단이 지키고 있었다. 미군 1사단은 9사단으로부터 제39보병연대를 증원받았다. 이 39연대가 7월 31일 트로이나에서 추축군 방어선 돌파에 실패하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추축군은 트로이나가 잘 감제되는 고지에서 참호를 깊게 파고 눌러앉아 있었으며 인근은 불모지라 마땅한 엄폐물도 존재하지 않았다. 공격하기에는 정말 더러운 조건이었는데, 이에 미군은 대규모 포병을 운용했다. 105mm 견인곡사포 9개 대대, 155mm 곡사포 6개 대대, 155mm 롱 톰 곡사포 1개 대대로 구성된 포병대는 총 165개의 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에 연합군 특유의 공습이 더해졌다. 이러한 대규모 포병 화력과 항공기를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6일간 서로 박터지게 고지를 뺏고 뺏기는 혈전이 벌어졌는데, 이는 2군단장 [[오마 브래들리]] 장군과 1사단장 테리 앨런 장군을 당황시켰다. 전투 도중이던 8월 2일, 지휘부는 지지부진한 상태를 깨고자 존 보웬 대령의 1사단 26연대를 트로이나에서 추축군 쪽 2마일 후방에 위치한 몬테 바실리오[* 이름을 보면 유추하겠지만 산이다.]로 우회시켰다. 독일군도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아서 26연대는 강력한 포화를 뒤집어썼으나 1개 대대가 먼저 들어가 포화를 얻어맞으면서도 진지화에 성공하여 추축군의 뒷목을 잡아챈 격이 되었다. 바로 그날 오후 독일군 제29장갑척탄병 연대가 반격을 개시했으나 26연대 병사들의 분투와 포병의 화력지원으로 격퇴되었다. 추축군은 트로이나에서 되도록 시간을 오래 끌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26연대를 몬테 바실리오에서 치우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포병 화력을 집중시키는 한편 끊임없이 공격부대를 파견했으나 8월 5일까지도 26연대를 몰아내지 못했다. 이러는 중에 26연대는 상위부대인 1사단과는 사실상 단절된 채 고립된 데다 기껏 시도한 항공 보급도 시원찮아서 보급품이 거의 떨어진 상태였다. 인명 손실도 심각해서 1개 중대에 전투가 가능한 병력이 17명 뿐인 중대도 있었다고 한다. 이 와중에 독일군 보병대가 다시 공격을 개시했는데, 제임스 W. 리즈 일병[* Private.]은 자신이 뛰쳐나가 기관총좌의 시선을 끌고는, 자신이 소속된 박격포반이 3발 남은 포탄을 쏘도록 유도하여 마지막 포탄으로 기관총좌를 끝장내는 데에 성공했다. 이후로도 적의 집중포화에 전사하기 전까지 그는 끈질기게 사격하며 저항했다. 이 공로가 인정되어 그에게 [[명예 훈장]]이 추서되었다. 8월 5일까지 26연대를 몰아내려는 모든 시도가 좌절된 데다, 규모가 9사단 39연대로 증강된 1사단의 파상공세로 인해 제15장갑척탄병 사단은 매우 큰 손실을 입고 있었다. 결국 후베 장군은 15사단을 물렸고, 8월 5일 밤에 추축군은 철수한다. 그리고 드디어 1사단은 힘겹게 휴식을 쟁취하여 후방으로 물러설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